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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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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박스(주)플러스엠

2017. 6. 28. 개봉

흔히 역사학의 의의는 과거의 일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갖고 영화를 만들 때에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거나 이야기의 밑재료로만 활용하고 말아 버린다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의의가 없는 것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는 것은 힘들다 하더라도, 최소한 오늘날의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 <박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황태자 암살 계획 모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한국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박열(이제훈)은 3.1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인력거꾼 등의 막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및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호감을 느낀 일본인 동료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제의로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동거를 시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도쿄와 요코하마 일원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괴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려 합니다. 일본인들은 자경단 등을 결성하여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힘든 ‘十五円五十錢’(15엔50전)을 시켜 보고 이걸 제대로 못하면 바로 죽여 버리는 식으로 무려 6천여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합니다.

이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세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려 합니다. 이 때 주목받은 것이 바로 박열과 그의 동료들의 황태자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폭탄 확보를 하지 못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국론을 결집하기엔 아주 좋은 재료였지요.

당시는 일본이 3.1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악화된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것을 시도했던 때입니다. 국제 사회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기네가 대역죄인에게도 공정한 법적 절차를 보장할 정도로 문명국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박열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여, 재판 과정을 3.1운동과 간토 대학살의 진상을 세계 만방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

영화는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짚어 나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박열이 심문 도중에 일갈하듯, 일본이 만약 진정한 문명국이라면 식민 지배 자체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섣부른 유화책으로 여론을 호도하려 들지 말고요.

이것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비겁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오늘날 일본 정부의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다고 속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만, 여전히 그들의 정부는 간토 대학살은 물론 위안부 문제 같은 사안에도 아직까지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제국주의 일본이 보여 준 여론 통제 및 정치 권력의 부당한 재판 개입은 지난 박근혜 정부의 전횡을 곧바로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정당성을 잃은 권위가 억지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할 때의 행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훈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자유롭고 편하게 청년 박열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장난끼와 결연한 의지를 번갈아 보여 주는 악동의 이미지는, <파수꾼>으로 처음 주목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미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최희서는 이 영화의 진정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키스트 여성 활동가로서의 기백과 애인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후미코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감독의 전작 <동주>가 송몽규의 영화이기도 하듯, 이 영화는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동지적 연대에 기반한 그녀의 강한 의지와 사랑은 박열의 투쟁을 밝힌 횃불이었고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함을 대표하는 인물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할을 맡은 김인우 역시 이번 영화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그는 <암살>, <동주> 등의 영화에서 최근 몇 년간 일본인 배역 전문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바 있지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서 <박열>이 뛰어난 점은, 섣불리 감정을 자극하려 들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이 처한 상황을 다각도로 따져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느꼈을 법한 진짜 감정과 딜레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한국 역사물들과 이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그동안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을 보여 주기보다는, 실존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가상의 감정을 작가나 감독이 추정하여 극화한 영화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 씬은 대부분 사족이거나, 너무 단순해서 신파조로 느껴지곤 했지요. 최고 흥행기록을 갖고 있는 <명량>부터 몇 주 전에 개봉했던 <대립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약점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사도>나 <동주>도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특히 절정 부분이나 결말에 다가갈수록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그런 장면들이 생각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인물 그 자체보다는, 인물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의 해석이 더 중요했던 영화들이기도 했고요.

그에 비하면 <박열>은 인물과 역사적 상황을 앞세우고 감독이 한 발 물러서는 쪽이라서, 관객은 이 세기의 아나키스트 커플에게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기백과 의지, 동지로서의 연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동료들의 마음 같은 것들을 하나씩 가슴에 품어 가면서요. 바로 그런 것들이, 미끈하게 잘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건네는 소중한 선물일 것입니다.

우디 앨런

우디 앨런은 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코미디 감독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지역 신문 유머난에 돈을 받고 기고하던 십대 시절부터 빛을 발했습니다. 이어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경력을 쌓으면서 여러가지 TV쇼의 각본을 쓰던 그는, <What’s Up, Pussycat?>이란 영화의 각본을 맡고 출연까지 하게 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의 실질적인 감독 데뷔작 <돈을 갖고 튀어라>(Take the Money and Run) (1969)는, 가상의 악명 높은 은행강도에 대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요즘 감각으로 봐도 무척 웃기는 영화입니다. 이후 여러 편의 코미디를 내놓은 그는, 1977년에 만든 로맨틱 코미디 <애니 홀>(Annie Hall)로 이듬해 아카데미 주요 4개 부문(작품, 감독, 각본, 여우주연상)을 석권하면서 주목받는 감독이 됩니다. 이후 40년 동안 적어도 매년 한 편씩의 장편 영화를 선보이며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불가능한 열정에 휩싸인 인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그럴수록 주인공은 점점 더 집착하게 되지요. 이 과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거나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외도와 불륜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사랑이나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범죄나 살인 같은 범죄, 세속적 성공 같은 것을 욕망하는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디 앨런 영화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졌을 법한 감정을 다루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우디 앨런에게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합니다. 팔순이 넘어서도 매년 한 편씩 영화를 내놓는 왕성한 창작력과 시들지 않는 유머 감각, 지적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노력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영화 세계는 단숨에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숱한 시행착오와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여러 번 거친 끝에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으니까요. 그가 감독한 48편의 장편 영화 중 절반 가량은 범작이거나 평균 수준에 못 미치는 영화인 것은 그런 모색의 결과입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오랫동안 힘이 되어 준 동료 스태프들이 있었습니다. 에이전트이자 죽기 전까지 모든 영화의 제작자로 나섰던 잭 롤린스(2015년 사망)와 찰스 H. 조페(2008년 사망), 시대를 달리하며 그의 작품을 전담해 온 3명의 편집 감독 랠프 로젠블럼(95년 사망)-수잔 E. 모스-앨리사 렙셀터, <애니 홀>과 <맨하탄>을 비롯하여 4편의 각본을 함께 쓴 마셜 브릭먼 등이 없었더라면 우디 앨런이 누리고 있는 오늘과 같은 영광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장편 감독작만 따져도 47편이나 되는 우디 앨런의 작품 세계를 대략 네 시기 정도로 나눠 간략하게 살펴 보고 추천작들을 소개합니다.

[하나] 웃기는 남자, 최고 감독이 되다 (1969~1979)

데뷔 초기 우디 앨런의 영화는 ’웃기면 장땡’이라는 코미디의 대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가짜 다큐멘터리, SF, 성 지침서, 러시아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패러디하고 풍자하면서 관객을 웃겼습니다. 흔히 우디 앨런의 대표작으로 꼽는 영화들과는 이야기 전략 자체가 달라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영화들입니다.

하지만 <애니 홀>(1977)과 <맨하탄>(1979)은 확실히 보편적인 의미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로맨스물의 플롯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실험적인 표현 형식이나 과감한 인물 설정을 통해 감독 특유의 개성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흥행에도 성공하면서 앨런의 영화 작업 환경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줬습니다.

그럼에도 앨런의 미학적 모색은 한동안 계속됩니다. 각각 잉마르 베리만과 페데리코 펠리니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는 <인테리어>(1978)와 <스타더스트 메모리>(1980),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강하게 의식한 <한여름 밤의 섹스 코미디>(1982) 같은 영화들이 그랬습니다.

[둘] 자기만의 스타일을 꽃 피운 전성기 (1983~1993)

이 시기에 앨런은 초기의 관심사와 형식에 대한 실험 정신을 이어받아 자기만의 색깔을 완성했습니다. 이 시기 이후의 영화들은, 이 때 나온 요소들을 활용하여 더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아 패로와의 협업은 이 시기 영화들을 특징짓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전까지 지적이고 유머 감각 넘치는 다이앤 키튼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로맨틱한 몽상가 스타일에 가까운 미아 패로를 등장시키면서 우디 앨런 영화 특유의 색깔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을 다루는 앨런 특유의 주제 의식이 효과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앨런의 80년대 영화들은 모두 챙겨볼 만한 작품들이지만, 1930년대 뉴저지의 주부가 영화 속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기도 한 <한나와 그 자매들>(1986), 건조하고 깔끔한 범죄물이자 블랙 코미디인 <범죄와 비행>(1989), 이렇게 셋은 꼭 봐 두어야 할 작품입니다.

[셋] 스캔들과 함께 찾아 온 최악의 침체기 (1994~2004)

우디 앨런은 순이 프레빈과의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가운데서도 계속 영화 작업을 합니다.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를 시작으로 당대의 유명 배우들을 멀티 캐스팅하며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면서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이전 작품들에 비해 현저하게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내놓게 됩니다.

그간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웬만하면 제작비 회수는 가능한 영화를 만들었던 그인데, 이 시기에는 날이 갈수록 흥행 성적이 하강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던 시기입니다.

그나마 브로드웨이 진출을 꿈꾸는 극작가의 분투를 다룬 소동극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와 입양한 아이의 생모 찾기 소동을 그린 <마이티 아프로디테>(1995)는 언제 봐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넷] 재도약과 국제적인 흥행 성공 (2005~현재)

<멜린다와 멜린다>(2004)의 실패 이후 돌파구가 필요했던지, 우디 앨런은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뉴욕 대신 영국의 런던을 배경의 영화를 찍습니다. 그것이 바로 범죄물이자 블랙 코미디인 <매치 포인트>(2005)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만듦새와 흥행 성공(전세계 수입 8천 7백만불 이상)으로 기적같이 부활한 앨런은, 이후 몇몇 유럽 도시를 배경으로 유람하듯 영화를 찍습니다.

이 시기에는 평범한 작품도 많았지만, 사랑과 예술에 대한 태도를 풍자적으로 다룬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나, 밤마다 20년대 파리의 ‘황금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작가의 판타지 <미드나잇 인 파리>(2011) 같은 수작들은 자신의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차례로 경신하기도 했지요.(각각 전세계 수입 1억불, 1억 5천만불) 이어, 남편과의 이혼으로 상류층의 삶을 포기한 중년 여성의 정신적 불안을 다룬 <블루 재스민>(2013)까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작품 활동 막바지에 활력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신작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올 하반기에 공개될 이 작품에서는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케이트 윈슬렛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호흡을 맞출 예정이지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50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작업에 매진하는 그의 부지런함은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런던 프라이드 Prid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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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

2017. 4. 27. 개봉

연대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감과 지지를 표명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주는 사회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연대의 대상은 소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층이나 다수파들의 이익을 지지하고 그들의 편이 되는 건 ‘야합’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테니까요.

하지만 연대가 말처럼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사회 전체로 볼 때, 소수자들과 공감하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다수파라고 생각하며 소수자들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도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가진 사람들만이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런데 이들마저도 서로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연대의 대상과 자신 사이에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고 느낄 때지요.

이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한 두 집단이 우여곡절 끝에 연대에 성공한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1984년 6월,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숨겨 온 스무 살 청년 조(조지 맥케이)는 난생 처음 런던의 게이 프라이드 행진(‘스톤월 항쟁’을 기념하여 매년 6월 마지막 주에 성소수자들이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벌이는 행진)에 참가합니다.

여기서 광부 파업을 지지하는 모금 운동을 펼치는 활동가 마크(벤 슈네처) 일행을 알게 된 그는,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파업 지지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LGSM(Lesbians & Gay Men Support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이라고 칭하며 모금 활동을 펼치지만, 처음에는 성소수자와 광부 양쪽으로부터 외면당합니다. 성소수자들은 마초적인 노동 계급 문화로부터 자신들이 받았던 모욕과 조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자기들이 ‘진짜 사나이’라고 생각하는 광부 노조 역시 성소수자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거부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노조를 건너 뛰고 광산촌이 몰려 있는 웨일즈 지역의 작은 마을들에 직접 연락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드디어 그 중 한 곳에서 성금을 받겠다는 응답이 오지만, 알고 보니 그들 역시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자신들을 돕겠다고 나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LGSM의 ‘L’이 런던의 머릿글자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그들의 모금에 깃든 진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마을로 초청하는 행사를 갖기로 합니다.

흥미진진한 변화와 성장

영화는 이들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성장과 변화도 잘 담아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일반적인 수준보다 좀 많은 편인데, 이들 하나하나에 애정을 갖고 차분히 그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조지 맥케이, 벤 슈네처 같은 신예들과 빌 나이, 이멜다 스톤턴 같은 관록 있는 노장들, 그리고 도미닉 웨스트, 앤드류 스캇, 패디 콘시다인 같은 중견급을 총망라한 영국 배우들의 연기가 이 연대와 공감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소수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대에 실패하는 이유를 좀 더 생각해 보면, 결국은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앞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힘을 보탤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신자유주의의 전략

기득권자들은 언제나 이런 부분을 노립니다. 80년대 대처 정권이 광부 노조와 성소수자들을 다룬 방식도 그랬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수자들을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과 연관시키고 낙인을 찍습니다. 단순하게 품위가 없다는 식의 얘기부터, 불법을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심지어 모든 악행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전략은 소수자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여론을 나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소수자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우린 안돼. 절대 못 해낼 거야.’ ‘저 사람들도 우리를 싫어할 거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소수자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고 화를 내게 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지난 9년 동안 해온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혐오를 부추기고 서로를 욕하고 적대하는 것을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 이들 극우 정권의 가장 큰 해악이었습니다. 그 후유증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대선 직후인 요즘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문재인 지지자들과 진보 진영 지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양쪽 다 우리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서, 기득권층이나 사회의 다수파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인데, 인터넷 상에서는 서로를 물어 뜯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남을 깔아뭉개면 당장은 자신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안 남게 됩니다.

함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서로 연대하는 일이 당장 큰 변화나 기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과 공동체적 연대의 경험은 어떠한 가시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똘똘 뭉치고, 서로의 잘잘못을 가려가며 헐뜯는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다시 한번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일어서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더 돌아봐야 합니다.

연대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을 수도 있지만, 연대하면 동지 한 명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바로 이듬해 게이 프라이드 행진에서 보여 준 광부 노조들의 연대는 이런 사실을 조용하지만 힘있게 웅변합니다.

 

24주 24 Woche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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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진진

산모가 원할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쳐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나라는 전세계에 60여개국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낙태는 논쟁적인 사안입니다. 태아도 생명이 있는데, 어머니가 마음대로 그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이 주된 논리지요. 사회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거나, 태아가 유전 질환을 가졌음에도 아이를 낳아 열심히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낙태 반대에 대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 <24주>는 아이를 임신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열심히 자기 할 일을 다하던 유명 코미디언이 결국 낙태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인기 절정의 코미디언 아스트리드(율리아 옌치)는 남편과 함께 딸 하나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뱃속에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죠.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어필하면서도, 촌철살인의 멘트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뱃속의 아이가 다운증후군일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스트리드 부부는 고심 끝에 일단은 아이를 낳아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일종의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온가족이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죠.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아에겐 선천성 심장병까지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옵니다.

독일은 1993년 이후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입니다. 낙태와 관련한 일정 시간 이상의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산모가 원할 때 언제든지 낙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뱃속의 아이를 지운다는 것은 산모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담이 많이 되는 일입니다. 특히 아스트리드처럼 아이가 많이 자란, 임신 7개월(24주)이나 되었을 때 낙태를 하게 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감독인 안네 조라 베라체드는 산모인 아스트리드의 일상과 감정을 보여 주는 데 집중합니다. 무대 위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가족들과 지낼 때의 편안함, 출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늘이 짙어져 가는 얼굴 등을 특별한 기교 없이 포착해 내지요.

이 때문에 아스트리드 역할을 맡은 율리아 옌치의 연기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였습니다.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주목받았던 율리아 옌치는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며 아스트리드의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낙태 이슈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낙태가 불가피한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이래도 불법이라고 막을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전반적인 인권 현실이 낙후된 시대나 사회를 배경으로 할 때 효과적이지, 독일처럼 낙태가 전면 허용된 사회에 대해서는 맞지 않는 전략입니다.

아스트리드의 경우는 낙태가 불가피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가정 분위기도 화목합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다고 해도 정상인 만큼은 아니지만 행복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선천성 심장 기형의 경우도 요즘에는 아주 심하지만 않다면 간단한 수술이나 시술로 완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아스트리드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는 부모들도 많은데, 태아의 살 기회를 산모가 박탈하면 안되는 거 아니냐고요.

하지만 손가락질하기 전에 아스트리드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낙태를 통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은 산모입니다. 자기 몸의 일부이자 또 하나의 생명인 태아를 인위적으로 떼어내는 일이 절대 쉬울 리 없습니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 영화는 낙태가 아주 개인적인 일이며, 최종 결정권은 언제나 산모에게 있어야 한다는 점을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남편이 낳고 싶어하고 남들이 눈총을 주더라도 산모가 어렵게 내린 결정 그 자체를 존중해 주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낙태가 사실상 불법인 나라에서 너무 앞서가는 주장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출산율이 낮은 데 낙태까지 허용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낙태는 이미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1천명당 낙태 건수는 낙태가 합법화된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많은 수준입니다. 언제까지나 생판 모르는 남이 하면 욕하고, 가까운 지인들이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고 감싸는 이중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화 속에는 아스트리드가 낙태 시술을 받는 과정이 자세히 나옵니다. 규정과 절차에 맞게 위생적인 환경에서, 산모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술되지요. 우리나라도 불법 시술로 인한 부작용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산모가 원할 때 낙태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산모가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여성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임을 신경쓰지 않는 애인과 배우자,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떨어져 출산과 육아 자체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회 경제적 여건, 장애를 가진 아이나 싱글맘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등에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낙태를 합법화하고 그에 대한 표준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것은 이제껏 산모 혼자가 져야 했던 책임과 부담을 우리 사회가 제도적으로 나눠 지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4주>는 비록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지만, 우리 사회가 낙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모의 결정은 존중하고 책임은 나눠 갖는, 적극적인 낙태 합법화 정책이 시행되기를 기원합니다.

엘르 Ell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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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쳐스

2017. 6. 15. 개봉

우리나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미지 혹은 관념은 과거에 고착돼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잘 나간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학업과 일상을 돌보고 가사 일을 담당하는 것은 여성의 몫인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일하는 여성들은 아무리 직장 일을 마치고 피곤에 절어 있어도 그녀에게 치대는 다른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 들여집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손해 보는 것은 많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거나 꿈꿀 겨를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것은 금기시 됩니다. 가장 사적인 욕망으로서 프라이버시를 보장 받아야 할 성욕조차 그러니까요. 성적 욕망을 자유분방하게 분출하는 여성에게 징벌을 내리는 문화적 관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엘르>의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경우는 확실히 다릅니다. 파격적인 성폭행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처음엔 그저 가냘픈 중년의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점차 그녀의 일상과 인간 관계가 소개되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수완이 드러나면, 그녀가 얼마나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게임회사 CEO인 그녀는 지지부진한 프로젝트를 자기 뜻대로 뚝심있개 밀어 붙이고, 자기 어머니-전 남편-아들 등 가족들과 밀당을 통해 주도권을 확보하며, 섹스 파트너를 고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기 결정권을 충분히 행사합니다.

그러니, 이런 그녀가 영화 속에서 겪는 두 가지 차원의 강간 사건 – 한 번은 육체적이고, 다른 한 번은 회사 인트라넷 상에서 벌어진 – 을 자기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심지어 완전히 그 의미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 폴 버호벤은 언제나 신체 훼손이란 설정과 가학적 묘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의문을 던져 왔습니다. 이것은 <로보캅>(1987), <원초적 본능>(1992), <스타쉽 트루퍼스>(1997) 같은 할리우드 흥행작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네덜란드의 대표 감독이던 시절에 만든 작품인 <사랑을 위한 죽음>(Turkish Delight)(1973), <포스맨>(The Fourth Man)(1983) 같은 영화에서도 두드러지게 표현됐던 일생의 화두지요.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 미셸이 가학과 피학을 극단적으로 넘나들며 주도권을 확보하는 모습, 다층적 인간 관계를 겹겹이 쌓아 올리고 그것을 주요 씬이나 컷에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연출력은 그런 연륜과 오래된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독의 비전이 구체화되는 데에는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의 소름끼치는 연기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어떤 순간이든 절대 허투루 흘려 보내지 않는 미셸이란 캐릭터의 존재감을 이만큼 단단하게 표현한 것은 이자벨 위페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녀의 표정은 무심한 듯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복잡한 계산과 격렬한 감정은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합니다. 그녀가 표정을 조금만 바꾸거나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기만 해도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그녀가 취하는 행동에서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면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특히 지하실에서 이웃집 남자와 사도-마조히즘에 가까운 관계를 갖고 난 후, 차오르는 오르가즘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마음껏 내지르는 장면은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복합적인 텍스트입니다. 성폭행범의 정체를 찾고 징벌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이기도 하고, 부르주아의 가족 생활과 사랑을 솜씨 좋게 풍자하는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며, 과거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의 심리극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상황을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일종의 신화 속 여신과도 같은 주인공 미셸을 통해 느끼는 대리 만족이 클 것 같습니다.

미셸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지만, 그 나이 또래 보통 여성이 갖는 욕망과 스트레스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빈틈없는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은 이기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항상 희생만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가 답답한 우리나라 여성 관객들에게 통쾌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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