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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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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쇼박스

2017. 9. 6. 개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 때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설과 영화는 수용자와 의사소통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에서 느낀 재미와 감동을 영화로 옮기려는 창작자는 어떻게든 변형을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원작 영화의 성패는 이 ‘변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동명 중편 분량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연쇄 살인범이라는 비밀을 감추고 살아온 동물병원 원장 병수(설경구)는 치매에 걸린 상태입니다. 외동딸 은희(설현)를 혼자 키워 온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컴퓨터와 녹음기를 동원해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인근 지역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병수는 은희의 귀가 시간을 단속하는 등 딸의 안전에 부쩍 신경을 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예기치 않게 접촉사고를 냅니다. 그가 사고를 낸 상대는 태주(김남길)라는 젊은이인데, 병수는 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직감합니다. 태주 또한 은희가 병수의 딸임을 알게 된 후 계속 그녀의 곁을 맴돌면서 병수를 주시하지요.

돋보이는 연출과 연기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란 설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을 제외하면, 여러 요소들이 원작과는 조금씩 다르게 재배치되어 있습니다. 대중적인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이야기의 장르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대체로 성공적인 편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작의 결말이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해 온 저로서는 이 영화의 각색 방향이 꽤 맘에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원신연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나레이션이 압도적으로 많은 초반 설정 단계를 리듬감 있게 엮어 내고, 병수와 태주가 같은 장면 안에 나올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낸 솜씨가 뛰어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이 녹록치 않은 일인데, 전형적인 플롯으로 뼈대를 잘 잡아 놓은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설정상 배우들의 연기와 서로 간의 호흡이 중요한 작품이었는데, 전반적으로 큰 문제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병수 역을 맡은 설경구는 이 쉽지 않은 캐릭터를 대단히 현실감 있는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극단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도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낼 줄 아는 그의 장점을 잘 살렸습니다.

김남길 역시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 줍니다. 영화 내내 차분한 외모와 행동거지를 유지하지만, 그 이면에 서려 있는 섬뜩한 광기를 표현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병수와 대척점에 선 그의 존재는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합니다.

설현의 연기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CF를 통해 대중적으로 각인된 이미지 때문에 초반 몰입이 좀 안 되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리없이 극에 녹아 들었습니다. 앞으로 연기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려면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결말 부분을 장르적으로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뭔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다 보니 이전까지의 리듬이 흐트러집니다. 전체적으로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 뭔가 반전 요소를 더 넣으려고 하니 무리가 따릅니다. 이 영화의 쾌감은 퍼즐이 맞아 떨어지거나 완전히 재조합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스펜스나 스릴 같은 정서적 효과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

전체적인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 수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과 정신을 갉아먹는 이 병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이런 갈등 요소가 있기 때문에 치매는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됐습니다

김영하의 원작이 독특했던 것은 치매 당사자의 심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묘파했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의 입장을 그리는 경우가 많지요. 게다가 치매 증세가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지도 모를 연쇄 살인범에게 나타난다는 설정 또한 참신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참신한 설정을 그대로 빌려 와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치매가 한 인간의 모든 기억을 무너뜨리는 참혹한 형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화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포착한 것은 이 영화만의 인상적인 특징입니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재빨리 어디에선가 의미를 찾아내어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 인간 정신의 오래된 습관이지요.

애초부터 인간의 기억력과 판단력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더이상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허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삶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줍니다.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법이라는 걸 잊지 말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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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믹 블론드 Atomic Blond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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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2017. 8. 30. 개봉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여성 영웅의 역사를 새롭게 쓴 배우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린다 해밀턴이나 <에일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터프하면서도 모성애를 갖춘 인물을 연기한 이들의 존재는, 더는 여성이 액션 영화에서 주변적인 역할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이 영화 <아토믹 블론드>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액션 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준 샤를리즈 테론의 첩보 액션물입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격투 실력을 보여 준다는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89년 11월, 영국의 첩보 기관 MI6 소속 요원 한 명이 살해당하고 그가 확보한 스파이 명단이 사라집니다. MI6의 실력파 요원 로레인(샤를리즈 테론)은 범인을 잡고 첩보원 명단을 확보한 후, 이 정보를 제공한 동독의 협력자 암호명 스파이 글라스(에디 마산)를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베를린으로 급파됩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MI6의 괴짜 지부장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과 접선하기도 전에 소련의 KGB 요원들의 습격을 받는 등,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로레인은 프랑스 첩보원 델핀(소피아 부텔라) 등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훌륭한 액션, 느슨한 이야기

겉보기에는 매혹적인 금발 미녀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주눅 들지 않고 우직하게 상황을 돌파하는 로레인은 분명 인상적인 캐릭터입니다. 모델 뺨치는 패션 스타일과 일류 격투기 선수도 울고 갈 뛰어난 액션 실력은 부자연스런 조합인 것 같지만,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하면 전혀 위화감이 없어집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로레인의 격투 장면들은 이 영화를 가장 빛나게 하는 요소입니다. KGB 요원들과 좁은 차 안에서 벌이는 격투나 고무호스 같은 지형지물을 활용한 액션 등은 하나도 버릴 만한 장면이 없습니다.

특히, 스테디캠을 활용한 절정 부분의 격투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근접 거리에서 격투 중인 인물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마치 싸움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 주지요. 같은 날 개봉한 <킬러의 보디가드>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촬영된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 쪽이 더 길이도 길고, 수평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계단을 활용한 수직적 움직임을 잡아내는 등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줍니다.

다만, 약점이 있다면 이야기에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적국 정보원, 이중간첩, 첩보원 명단의 존재 등 첩보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로 구색은 갖추고 있지만, 흥미진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엎치락뒤치락하는 영화일수록 주인공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 설령 나중에 그것이 거짓이었음이 판명되더라도 — 관객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실패하거나 배반당하진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느낌으로 영화를 보게 되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로레인이 장면마다 어떤 의도를 갖고 움직이는지 모호할 때가 많아 긴장감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감독 데이빗 레이치는 스턴트맨이자 무술 감독 출신으로,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존 윅> 1편을 공동 감독한 바 있습니다. 이 영화도 <존 윅>처럼 좀 더 단순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쉴 틈 없는 액션을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수준 높은 액션 장면들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좀 길게 느껴집니다.

새로운 여성 영웅, 한국은?

흔히 여성 액션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여성의 투쟁 과정이 그럴듯해 보이도록 감정적 근거를 만들어 주려 합니다. 모성애, 이성에 대한 사랑,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들을요. 여기에는 ‘오죽했으면 여자가 저럴까’ 하는 식의 성차별적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남성 주인공은 단순히 첩보 요원이거나 킬러, 갱스터 같은 직업상의 이유만 갖춰도 모험의 근거를 쉽게 확보하곤 하니까요.

<아토믹 블론드>의 경우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 로레인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철저히 직업적 판단에 기초하여 행동합니다. 그녀는 첩보원으로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정한 사투를 벌이며 뚜벅뚜벅 나아갑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최근 들어 이런 여성 캐릭터는 서구 영화에서 자주 눈에 띕니다. 올해 개봉작인 <미스 슬로운>의 제시카 차스테인이나, <엘르>의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이들 역시 냉철한 판단과 실행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인생을 관리합니다. 이런 인물들의 출현은 서구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과 성 역할에 대한 관점이 변화한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최근에 나온 우리나라의 여성 주인공 영화들은 인물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설정 부분이 여전히 전통적인 성 역할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타운>(2015)의 일영이나 <악녀>(2017)의 숙희가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는 이성에 대한 호감입니다. <비밀은 없다>(2016)의 연홍을 움직이는 동력은 모성애죠.

이렇게 구태의연한 설정을 창작자의 게으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는, 특히 대중적인 상업 영화는 사회의 통념과 분위기를 뒤따라가는 매체이지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 적합한 도구는 아닙니다.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국 대중 영화에서 더 신선한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편견을 바로잡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매년 세계 여성의 날에 발표되는 이코노미스트지의 ’여성 유리천장 지수’에서 OECD 최하위권을 기록한 한국 대중 영화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킬러의 보디가드 The Hitman’s Bodyguar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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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앤씨미디어그룹

2017. 8. 30. 개봉

장르 영화를 잘 만들려면 장르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기존 작품과 다른 점을 만들어 내야 하는 모순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해당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쾌감은 물론이고, 다른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도 원합니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공식대로 가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방식을 무시하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없습니다.

이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 역시 그런 고민이 잘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처음 티저 포스터를 봤을 때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90년대 히트작 <보디가드>(1992)를 패러디한 포스터였죠. 한눈에 두 주인공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고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남성 버디 액션 코미디라는 이 닳고 닳은 장르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업계 최정상급 보디가드인 마이클 브라이스(라이언 레이놀즈)는 자신의 일 처리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원래 정예 작전 요원 여러 명과 최고급 승용차들을 동원한 럭셔리 경호가 특기였던 그는, 어느 날 의뢰인이 예상치 못하게 암살당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제는 눈에 잘 안 띄는 싼 차를 타고 혈혈단신 의뢰인을 보호해야 하지만, 실력만큼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습니다.

한편, 벨라루스의 독재자 두코비치(게리 올드만)에 대한 재판을 진행 중인 국제사법재판소는 감옥에 갇혀 있는 청부살인업자 다리우스 킨케이드(사무엘 L. 잭슨)를 증인으로 내세우려 합니다. 유력한 물증을 지닌 다리우스는 다른 감옥에서 복역 중인 아내 소니아(셀마 헤이엑)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협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호송 과정에서 그를 저지하려는 두코비치 패거리의 공격을 받고, 다리우스와 그의 담당 인터폴 요원 아멜리아 루셀(엘로디 영)만이 은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다리우스는 아무도 모르게 재판소가 있는 암스테르담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에 아멜리아는 전 남자친구이기도 한 마이클에게 경호 서비스를 요청합니다.

버디 액션 코미디의 재미 

흑-백 남성 조합의 할리우드 액션물은 에디 머피와 닉 놀테가 나온 <48시간>(1982)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심 사건을 해결하면서 인종적 차이, 그리고 경찰과 범죄자라는 입장의 차이가 빚어내는 갈등을 점차 팀워크로 승화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지요. 4편까지 나온 <리쎌 웨폰>(1987) 시리즈와 3편까지 나온 <러시아워>(1998) 시리즈 등은 이런 전형의 변주로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였습니다.

<킬러의 보디가드> 역시 그런 공식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여러모로 80년대 홍콩 코믹 액션 영화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과장된 인물 설정, 웃기는 대사와 슬랩 스틱 코미디의 조화, 총기 액션과 격투 액션이 적절히 배합된 것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간 철 지난 느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각본이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전체 스토리는 단순하고 뻔하며 인물들의 관계 변화도 정해진 순서를 따르지만,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단계를 밟아 나가는 과정이 좋습니다. 마이클은 국제적인 임무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뢰인인 다리우스와 인간적 교감을 나누고, 자신의 내적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무리없이 잘 엮은 것이 돋보입니다.

또한, 의외로 액션의 쾌감이 상당합니다. 물론 <존 윅> 시리즈처럼 고난도 액션을 볼거리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화면의 화각을 좁히고 빠른 템포로 편집함으로써 관객이 체감하는 액션의 긴박감과 속도를 높였기 때문에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의 암스테르담 추격 장면은 속도도 빠르고 길이도 충분해서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식당과 공구 상점에서 벌이는 액션 장면도 스테디캠을 잘 활용하여 현장감을 높였습니다.

두 주연 배우의 코미디 호흡 역시 생각 이상으로 좋습니다. 세심한 실력파지만 뒤끝 있는 보디가드를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본능에 충실한 마초 로맨티스트 킬러를 연기한 사무엘 L. 잭슨은 완전히 상반된 두 인물의 대결을 잘 그려냅니다. 자잘하게 투닥거리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것은 물론,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쌓인 신뢰와 우정의 크기를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나이’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지요.

액션 영화에서 여성을 다룰 때

액션 영화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제한적이었습니다. 간혹 강도 높은 액션을 선보이는 여성 주인공 영화가 있긴 했지만, 많은 경우 여성은 구원의 대상이거나 남자 주인공의 액세서리, 그것도 아니면 끔찍한 범죄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기 일쑤였지요.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은 남성이 다 합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은 뻔한 액션 코미디치고는 신선합니다. 두 남성 주인공에겐 각각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이 있습니다. 아내의 사면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건 모험이건 탈옥이건 다 할 수 있는 다리우스가, 여자 친구였던 아멜리아와의 관계 회복을 마음 깊이 바라지만 도무지 방법을 모르는 마이클에게 직설적인 조언을 하며 개입하는 장면들은 큰 웃음을 줍니다. 액션 영화에서 웬 사랑 타령이냐는 불평도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성적 긴장감과 재결합에 대한 기대라도 없었다면 평범한 액션물에 그치고 말았을 거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근래 개봉한 몇몇 한국 영화들은 영화 속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태도 때문에 지적을 받았습니다. 감독이 뒤늦게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거듭 사과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이렇게 여성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단순히 호감의 대상이나 범죄의 피해자로 다루는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영화들에 비하면, <킬러의 보디가드>는 데이트용 영화로 선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괜찮은 영화입니다. 여성을 비하하거나 영혼 없는 인형으로 만들지도 않고, 더 나은 남녀 관계를 위해 남자가 노력해야 할 일까지 알려 주니까요. 어느 정도 알아들을 귀가 있는 남자라면, 이 영화를 보고 자기 여자친구나 아내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재검토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여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신사적으로 대해 주라는 고전적 기사도 정신을 반복할 뿐이지만, 그 정도도 못 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한 한국 현실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Valerian and the City of a Thousand Planet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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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씨네마(주)

2017. 8. 30. 개봉

우주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중학생 무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딴에는 세상 돌아가는 걸 좀 알겠다 싶을 때라, 지구 밖에 있을 법한 다른 종류의 삶도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만화로 된 어린이 과학 교양서에 나온 정도 밖에 없었지만, 특이하게 생긴 외계인을 만나거나 이국적인 외계 행성을 여행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죠.

뤽 베송 감독의 신작 SF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는 바로 그런 종류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이라는 프랑스의 인기 SF 만화책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프랑스 영화 사상 최고인 2억 9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다고 합니다.

우주수호부의 일급 요원 발레리안(데인 드한)과 로렐린(카라 델레바인)은 늘 아웅다웅하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아끼는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이들은 도난당한 우주 정부의 재산이자 신비의 생물인 ‘컨버터’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아슬아슬하게 완수한 후, 수천 가지 외계 종족이 드나드는 거대 우주정거장 알파로 귀환합니다.

방사능이 검출되는 알파 내부의 특정 구역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은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신원 불상의 외계 종족으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클라이브 오웬)이 생포당하고 발레리안의 생사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로렐린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윗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발레리안을 찾아 나섭니다.

현란한 시각 디자인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현란하게 묘사된 우주 곳곳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외계 행성의 풍경, 다양한 성격의 외계 종족들, 우주선을 비롯한 여러 기계 장치들의 다채로운 디자인 등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반적인 SF 영화 세 편에 나올 법한 분량의 CG 화면이 이 한 편에 쏟아지거든요.

주인공을 맡은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바인의 연기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입니다. 특히, 둘이 한 화면 안에서 함께 연기할 때가 좋습니다. 재치있게 비꼬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밀당을 하는 동안 꽤 흥미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거든요.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 가는 두 사람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영화 전체로 봤을 때 서브 플롯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느린 템포로 심심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문제입니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특별히 심각한 장애물을 만나지 않습니다. ‘어떤 외계인을 만나서 이렇게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면 거의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영화 내내 적대 세력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의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고, 따라서 관객들도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합니다.

도입부에서 뮬 행성이 나오는 장면이나 ‘컨버터’를 구하는 시퀀스, 그리고 결말 부분이 그나마 흥미진진한 편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이야기의 재미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두 주인공과 함께 신비한 우주 세계를 체험한다는 기분으로 보는 게 여러모로 나은 선택입니다.

낙관적인 우주 백일몽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전반적인 느낌은 한마디로 10대 초반 청소년의 낙관적인 백일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설정상 특수 요원들이지만, 미지의 우주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 외계 문명을 대하는 때묻지 않은 호기심, 실제보다 약간 과장된 자아상에서 나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등을 지닌 사춘기 청소년들 같지요. 이야기 전개도 우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는 쪽이어서,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성인 관객에게는 애들 장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치하고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영화라고 낙인 찍기는 좀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만큼 장점도 있으니까요. 우주 시대의 도전과 꿈을 그리면서도,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같은 잘못된 편견에 기초하지 않고, 무엇보다 정의와 사랑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면모를 보여 줍니다. 쓸데없이 무섭거나 폭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1, 2학년 정도의 청소년에게 관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주에 대한 꿈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치기 시작할 나이에 보기는 더없이 괜찮은 작품이니까요. 이 영화를 본 학생들이 나중에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도가 되겠다고 다짐하거나, 다른 SF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설정이나 캐릭터 디자인 같은 면에서 <아바타>나 <스타워즈> 등 다른 유명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청소년 눈높이의 각본에 이렇게나 많은 제작비를 투입한 것도 산업적 측면에서 봤을 때 문제입니다.실제로 전 세계 흥행 성적이 1억 3천만 달러(8/21 기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우주에 관해 막연한 공상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각박한 세상살이는 잠시 잊고, 극장에 앉아 예전에 꿈꾸던 모험과 로맨스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는 것 자체가 좋은 휴식이 될 테니까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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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엔터테인먼트

2017. 5. 17. 개봉

개봉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불한당>에 대한 첫인상은 ‘새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조폭에게 접근한 수사 요원이라는 설정은 이런 부류의 갱스터 영화에서는 흔한 것입니다. 교도소에 잠입한 수사관과 교도소의 제왕이 친분을 쌓는다는 설정 면에서 유사한 다른 영화 <프리즌>이 먼저 개봉하여 흥행한 것도 불리한 점이었습니다.

게다가 개봉 직후 이 영화를 연출한 변성현 감독의 SNS 계정 내용을 캡처한 사진 파일이 돌면서,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 2위에 감독 이름이 오르내린 것도 사람들이 관람을 꺼리게 된 이유였죠.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첫 주말부터 예매율이 빠르게 하락했고, 영화가 괜찮다는 입소문에도 불구하고 100만 명에 다소 못 미치는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습니다.

여름 시즌에는 아무리 평이 안 좋아도 한국 영화 개봉작이라면 100만 넘기는 게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흥행 부진은 더 아쉽게 느껴집니다. 대중적 오락 영화로서 재미와 볼거리를 두루 갖춘, 요즘 보기 드문 한국 영화였으니까요.

마약 밀매 조직의 에이스인 재호(설경구)는 감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교도소 내부의 담배 유통권을 가지고 교도소를 장악한 그는 왕처럼 생활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돌한 신참 죄수 현수(임시완)가 그의 눈길을 끕니다. 키도 작고 호리호리하지만 타고난 싸움 실력과 깡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마침 교도소 내 권력 다툼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재호를 돕게 되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급격하게 친해집니다. 그러나 현수는 재호의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혈안이 된 경찰 천 팀장(전혜진)이 일부러 심어 놓은 작전 요원입니다.

장르 영화의 쾌감을 살리는 방법

한국 영화 중에서 장르를 표방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기본 설정이나 아이템이 좋을 뿐, 전체적인 영화적 완성도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장르 특유의 주제와 사건은 갖추고 있지만, 인물을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에 개연성이 떨어질 때가 많았지요.

특정한 스타일이나 플롯은 장르 영화가 갖추어야 하는 기본 조건일 뿐입니다. 일반 관객이 장르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개성 넘치고 설득력 있는 등장인물이 장르 규칙이라는 숙명 안에서 어떤 외적 투쟁과 내면의 갈등을 경험하느냐’입니다. 이걸 보여 주지 않고 그저 장르의 외피를 답습하거나 극단적인 표현에 골몰하면 관객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영화 <불한당>은 장르 영화의 쾌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한 점이 가상한 영화입니다.

먼저, 인물들의 진짜 목표와 욕망을 적절한 시점에 드러나게 하면서 갈등과 긴장을 유발하는 구성이 좋습니다. 뭔가 정리됐다 싶으면 등장하는 잦은 플래시백들은 다른 영화에서처럼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는 방식을 피하면서, 효과적으로 주요 인물들의 겉모습과 다른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이로 인해 서스펜스는 증폭되고 ‘이다음엔 어떻게 될까?’ 하는 기대 역시 점점 높아집니다.

장면 설계도 잘 돼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고 신선하게 느껴질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재호가 자신과 결탁했던 교도소 계장에게 배신당하는 장면을 건물 안쪽에서 창문을 통해 보여 준 것이나, 후반부의 인감도장 회수하러 가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를 공간과 배우를 활용해 인상적으로 설계한 것 등이 그 예입니다.

다만 절정부로 치달을 때 재호가 하는 선택이 다소 작위적인 면은 있습니다. 이제까지 현명한 판단을 해 온 그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예정된 결말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겠지만, 설득력이 다소 약해 보였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호흡도 최근 몇 년간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축에 듭니다. 예전의 날렵한 얼굴선이 제법 살아난 설경구는 근래에 출연한 작품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습니다. 겉으로는 헐렁하게 보이고 속 편한 이웃집 형 같지만, 상황이 닥치면 무시무시한 도살자의 면모를 번득이는 재호라는 캐릭터를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연기합니다.

임시완 역시 <미생> 같은 드라마로 만들어진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완전히 일신하여 이제는 확실히 배우의 길에 들어섰음을 보여 줍니다. 작고 호리호리하지만 뛰어난 싸움꾼인 그는, 마치 허영만의 만화책 <비트>의 주인공 민을 연상시킵니다. 비록 영화판 <비트>(1997)에서는 정우성이 그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 영화가 지금 다시 만들어진다면 아마 임시완이 캐스팅 1순위가 될 것입니다.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영화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 준 전혜진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집념 강한 경찰로서 극의 균형을 잘 맞추어 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영화나 <마스터>(2016) 같은 영화처럼 극 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여성 조연이 나오는 영화가 많아지는 것도 여성 연기자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의 현재, 그리고 미래

상업적인 극영화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이 영화 속 세상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단히 재미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관객이 본전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소수의 잘 만든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한국 영화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일반 관객은 이미 한국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을 ‘한국 영화치고는 재밌었다’, ‘한국 영화인데도 괜찮더라’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국산 영화를 할리우드 화제작과 같은 수준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런 평가에 대해 오기가 생겨서라도 더 나은 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한국 영화 제작자나 감독 중에는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영화적 완성도에 관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흥행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울 뿐입니다. 흥행이 안 되면 완성도가 부족했다는 걸 돌아보기에 앞서 다른 영화 외적인 원인을 갖다 붙이기 바쁩니다.

이런 안일한 태도로 영화를 만든다면 앞으로 점점 더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장 올해만 해도 여름 시즌 기대작이었던 <군함도>가 제작비 회수가 어려운 흥행 성적에 그쳤고, 상영 2주 차를 맞은 <브이아이피>가 예매율 5위(영진위 통합전산망 8/30 기준)로 떨어진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물론 <군함도>는 스크린 독과점과 역사관 문제가 불거졌고, <브이아이피>가 여성에 대한 묘사로 반감을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두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는 일반 관객에게 지적받을 정도로 재미와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잘 만들었더라면 논란이 지금처럼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여름 흥행작 <청년경찰> 역시 여성과 중국 동포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흐름과 두 주인공의 앙상블이 빚어내는 웃음 덕분에 500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 <불한당>은 한국 영화계의 ‘관행적인 무기력함’과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어떻게든 상투적인 묘사를 피하면서 누아르 장르 본연의 쾌감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개봉 초기에 터진 악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흥행에는 고배를 마셨지만, 한국 영화계가 되찾아야 할 활력과 패기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보여 준 예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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