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그것 – 스티븐 킹

2017년 9월 10일

 

90년대 초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 붙은 신작 포스터를 오며 가며 눈여겨보던 사람이라면 괴상한 피에로가 그려진 영화 포스터를 기억할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피에로의 얼굴 밑에 ‘IT’이라는 영어 원제가 크게 써 있음에도 굳이 <피의 피에로>라는 우리말 제목을 붙여 놓은 것이 더욱 기괴했죠.

나중에 20대가 되어서야 이 잊을 수 없는 포스터의 원작 소설이 바로 스티븐 킹의 <그것>(It)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설을 굳이 찾아서 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비디오로도 잘 안 빌려 봤던 공포물을,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영화 일을 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준급 장르 소설들을 찾아 읽다 보니, 어느덧 스티븐 킹의 최고 걸작이라는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일단 번역본 기준으로 600쪽 내외의 두꺼운 책 3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또한 그 당시까지 스티븐 킹 소설은 영화로만 봤지 책으로 읽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권을 펼쳐 들자마자 곧 ‘이건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만나게 될 스티븐 킹 책들이 대부분 그랬듯, 한 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은 아니었습니다. 찬찬히 내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해지는 그런 책이었지요.

비오는 어느 날, 미국의 메인 주 데리에 사는 열 살 소년 빌 덴브로는 동생 조지에게 종이배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조지는 비가 흥건한 도로변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배수구에 배를 빠뜨리고, 이것을 꺼내려다 끔찍하게 살해당합니다. 빌은 조지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어른이 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성공한 빌과 그의 친구 여섯 명은 옛 친구 마이클이 건 전화를 받습니다. 빌의 동생 조지를 살해하고 데리 전체를 공포로 물들인 존재 ‘그것’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죠. 빌과 그의 친구들은 열한 살 나던 해에 잊지 못할 일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전화 통화 후 곧바로 자살을 선택하지만, 나머지 친구들은 열한 살 시절의 약속대로 데리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들의 어린 시절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 이들의 앞날에는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원래 스티븐 킹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공포 소설들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캐리>, <샤이닝>, <미저리>처럼 정말 오싹하고 무서운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스탠 바이 미>처럼 성장의 풍경을 담았거나,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돌로레스 클레이본> 같이 더 나은 삶을 향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다룬 작품들도 많았지요.

<그것>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 준 스티븐 킹의 모든 역량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이 책에는 그의 작품 세계의 모든 모티브들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왕따이거나 학대당한 아이들, 미치광이 살인마, 차별과 혐오에서 비롯된 끔찍한 폭력, 미국 특유의 도시 괴담(urban legend), 공포를 극복하고 얻은 성장의 열매라는 테마 등 이 소설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작가의 평생 자산이 된 것이죠.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작가 자신이 속한 미국 베이비붐 세대의 트라우마와 광기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동시에,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의 역사를 직시한다는 점입니다. 막간극 형식으로 소개되는 데리의 과거 참사들은 모두 그런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흑인, 떠돌이 외지인, 노동 운동에 대한 불신은 끔찍한 살육으로 이어집니다.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살인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티븐 킹의 관점으로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부추기고, 거기서 자란 일반 시민들의 불안감을 활용해 체제를 유지해 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80년대 중반 역시 에이즈 공포의 확산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성소수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팽배했던 때입니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데리는 메인 주의 가상 공간이지만, 미국 전체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발매 당시 기록적인 판매 부수로 스티븐 킹을 최고의 작가의 자리에 올려 놓은 데에는, 아이들의 성장이라는 테마도 큰 몫을 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왕따클럽’의 7인은 미국에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스트레스와 공포를 경험합니다. 비만이나 말더듬 혹은 ADHD 같은 개인적 결함부터,부모의 학대와 인종 차별 같은 것들을요.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될 스티븐 킹의 뛰어난 필력은 다양한 인물들의 생각과 느낌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맘이 짠해지기도 하고, 그들이 이뤄낸 조그만 성공에 함께 기뻐하며 감동의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데리의 괴물 ‘그것’은 사람들 내면의 잠재된 공포가 만들어낸 틈을 이용해 자신의 먹이로 삼아 버립니다. 혼자 고립되어 외로운 영혼에게 다가가 환각을 보게 한다음 그대로 먹어치워 버리지요. ‘왕따클럽’ 친구들이 ‘그것’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대단한 기술이나 마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서로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고,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 함께 힘을 모을 뿐이었죠. 오로지 그것만이 ‘그것’이 몰고 온 참혹한 살육을 막는 길이었습니다.

오늘의 세계인들은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고, 그런 삶이 지속되면 인간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뿐입니다. 여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분노는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향해 분출됩니다. 유럽의 이민자에 대한 혐오 정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바로 그 표현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여성, 성소수자, 외국인 등에 대한 혐오 정서가 높아지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것>은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분노와 혐오를 멈추고 적극적으로 연대할 것을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것만이 앞으로 인류가 겪게 될 불행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음습한 냄새를 풍기며 활동 중이니까요.

지난 주에는 이 책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그것>이 개봉했습니다. 영화판은 소설과 다르게 어린 시절의 이야기만 따로 모아서 다루고 공포 효과를 극대화하는 쪽에 신경을 더 쓴 편입니다.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교차시키면서 흥미를 유발했던 원작의 이야기 전략과도 다릅니다. 어른이 된 시점의 이야기는 따로 떼어 곧 제작에 들어갈 2부에서 다뤄질 예정입니다. 전체적으로 원작 소설의 주제 의식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온전히 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침 영화 개봉에 맞춰 2004년에 나온 번역본을 약간 수정하고 멋진 표지를 붙인 판본이 새로 출간되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정수를 맛보고 싶거나 영화를 보고 원작의 실체가 궁금해진 분들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

Advertisements

From → 글자들의 숲

댓글 남기기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