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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2017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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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2017. 3. 23. 개봉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만 본다면 우주 과학은 백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종과 성 평등이 기본 컨셉인 <스타트렉>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주 탐험을 소재로 한 비교적 사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에서 백인이 아닌 캐릭터가 활약하는 경우는 보기 힘듭니다.

최근작인 <인터스텔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주 과학에 관련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 백인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실제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여 미항공우주국(NASA) 구성원들을 다양한 인종으로 설정한 <마션> 같은 영화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 영화 <히든 피겨스>는 우주 개발의 역사가 백인들만의 것이라는 대중적인 통념을 보기 좋게 깨 버립니다. 소련과의 우주선 개발 경쟁에 골몰하던 시절, NASA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냈던 흑인 여성 과학자 세 명의 실화를 담고 있으니까요.

어릴 적부터 수학 영재였던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은 미국 최초의 유인 위성 계획에 투입되어 천재성이 번뜩이는 능력을 보여 주지만, 부서 내의 단 하나뿐인 흑인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적 대우와도 싸워 이겨야 합니다.

NASA 소속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리더인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는 하는 일은 많지만 그에 걸맞는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처음으로 도입된 IBM 컴퓨터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예측한 그녀는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그것을 권유합니다.

공학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메리(자넬 모네)는 상사로부터 엔지니어 시험을 보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NASA의 엔지니어 시험 응시 조건은 백인들만이 다닐 수 있는 학교에서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리는 곧바로 그 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한 법정 투쟁에 돌입합니다.

미-소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은, 흑인 민권 운동의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로서 심각한 흑백 차별이 상존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랭글리 연구 센터의 소재지인 버지니아 주는 철저한 흑백 분리 정책을 실시했었죠. 흑-백 결혼 금지법의 부당함을 알린 영화 <러빙>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적인 인종 차별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색 인종 전용 화장실을 쓰기 위해 800m 거리를 왕복해야 했고, 공공 도서관에서도 흑인 전용 서가만 이용할 것을 강요 받았으며, 부서 내의 커피 포트까지 따로 써야만 했으니까요. 갖은 모욕적인 상황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용기를 보여 주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동명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직접 각본을 쓴 감독 테어도어 멜피는,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도 유머와 배려를 잃지 않는 실제 인물들의 모습을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엮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극적인 순간들을 포착하여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솜씨는 자칫 무겁게 풀릴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편안한 톤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유명 팝가수 퍼렐 윌리엄스와 영화 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함께 참여한 사운드트랙은 그런 감독의 의도를 훌륭하게 뒷받침합니다.

주연을 맡은 세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은 편입니다. 힙합 엔터테인먼트 세계를 다룬 미국 드라마 <엠파이어>에서 카리스마를 보여 줬던 타라지 P. 헨슨, <헬프>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던 옥타비아 스펜서, 평소 SF와 여성주의에 큰 관심을 가져온 팝 아티스트 자넬 모네는 각기 다른 개성을 발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앙상블을 선보입니다.

이름값 있는 배우들이 다수 포진한 조연진 역시 안정감 있는 연기로 주인공들의 세계를 든든히 뒷받침합니다. 캐서린과 재혼하게 되는 존슨 대령 역의 마허샬라 알리를 비롯하여 케빈 코스트너, 커스틴 던스트, 짐 파슨스 등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흑인 여성 과학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이 가장 중요했지만,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총력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미국의 상황도 큰 몫을 했습니다.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인종과 성을 가리지 않고 어떤 재능이든 활용하려 했던 실용주의적 태도가 능력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죠.

또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준 부모와 남편, 아이들의 배려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 중 하나입니다. 만약 이들이 가사와 육아, 집안 대소사 등을 직접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했더라면 미국의 우주 개발은 큰 차질을 빚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직장 여성들이 갖기 마련인 수퍼맘 혹은 수퍼우먼 콤플렉스는 이들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정말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불합리한 제도가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아 왔으니까요.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가 성공한 몇몇 여성의 미담 사례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당사자들 역시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후배들이 다시 겪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군대 경력을 봉급 산정에 넣는 관행 때문에 같은 일을 하면서도 돈을 적게 받기도 하고, 결혼하면 퇴직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 풍조와 싸워야 하며, 여성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어린 시선을 감내해야 합니다. 특히 워킹맘들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잘 신경쓰지 않는 가사와 육아 부담 때문에 늘 시간이 없고 피곤하죠.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에 비해 우리나라 여성들이 불리한 점은 사회가 여성을 전혀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실력과 성과에 따라 공정하게 대우하는 나라도 아닐 뿐더러, 가사와 육아 부담을 고스란히 여성에게 지우는 것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곳이니까요.

우리는 더 공정한 나라, 국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연대할 줄 아는 나라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다가올 5월 9일의 대선이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첫 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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