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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2016)

2016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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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8. 개봉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중요합니다. 이야기란 ‘주인공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목표)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 끝에 문제 해결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주인공이 극 중에서 목표로 삼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구체적이고 납득 가능하게 보여 주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갖춰야 할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기본을 갖추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많은 실패한 작가들은 이렇게 착각합니다. 자기가 쓴 이야기는 주인공의 목표도 확실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도 명백하게 잘 설명돼 있다고요. 작가 자신에게는 언제나 모든 게 잘 구성돼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를 돈을 내고 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영화 <아수라>는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8), <무사>(2001) 등으로 유명했던 김성수 감독의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3년에 나온 재난 영화 <감기>로 10년 만의 연출 컴백에 성공한 이후, 고만고만한 기획물 대신 예전처럼 자기가 만들고 싶은 스타일의 영화에 다시 한 번 도전한 것이니까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대규모 재개발을 앞둔 가상의 도시 안남의 이권을 손아귀에 쥔 시장 박성배(황정민)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성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검사 김차인(곽도원)에게 약점을 잡혀, 거꾸로 박성배의 범죄 증거를 찾아다 바쳐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영화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도경의 모습을 따라다니며, 점차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냅니다.

이 영화에는 여러모로 눈여겨 볼 만한 구석이 많습니다. 믿고 보는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아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우리나라에 이런 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색다른 공간들을 찾아내어 안남시의 느낌을 잘 표현했으며, 역대급 카액션 장면을 비롯하여 공을 많이 들인 액션 시퀀스가 돋보입니다. 또한 상업 영화에서는 흔히 선택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 엔딩 시퀀스는 이 영화를 독특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닥 재미는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관객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도 딱히 재미는 없는데 자극만 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한도경 캐릭터가 잘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선 한도경의 목표가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그가 진짜 원하는 게 악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 돈을 벌어 아내를 치료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액션 누아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스타일의 캐릭터이니까 대충 미루어 짐작하고 넘어갈 뿐이죠.

또한 그의 목표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도경이 무슨 계획이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인지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관객들이 이야기에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더 힘들어지는 거죠. 그저 시퀀스마다 감독이 준비해 놓은 자극적인 상황들을 보여 주는 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이야기는 한도경이 발버둥치는 것과는 상관 없이 미리 정해진 수순에 따라 착착 진행됩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한도경과는 반대로 비리 시장인 박성배와 검사 김차인의 목표가 매우 분명하고, 두 사람 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한도경의 후배 형사인 문선모(주지훈)조차 자기 나름의 목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 움직임들이  얽히면서 엔딩의 지옥도를 그려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이 영화에서 한도경이란 인물은 슬쩍 가리고 넘어가도 크게 문제가 없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가 하는 일들이란 모두 다른 캐릭터에게 넘겨 줘도 하등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그를 빼고 시장이나 검사, 후배 형사 중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았으면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굳이 한도경을 주인공으로 삼아야 했다면, 한도경이 이 지옥같은 판에서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시장과 검사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 하는 과정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보여 줬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나리오 단계에서 지금보다 공을 더 많이 들였어야 하는 거죠.

요즘 한국 기획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들보다 훨씬 좋은 것은 스크린 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배급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10여년 전에 비해 기획 자체가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목표를 관객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으로 설정해 주면, 중간 전개 과정에서 조금 말이 안 되고 버벅거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관객들은 목표 달성 여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어느 정도는 참고 봐 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좀 더 참신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 내는 수준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죠.

모든 영화가 대중적인 재미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 <아수라>처럼 순제작비 92억원, 홍보비 포함 120억원 가량을 쓴 영화라면 당연히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야 합니다. 설익은 각본을 설계도 삼아 영화를 만든 결과는, 개봉 후 시간이 갈수록 떨어지는 예매율과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휴를 앞두고 개봉했고, 특별한 경쟁작도 없어서 12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최종 관객 수도 손익분기점인 320만은 넘겠지만 400만을 상회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잔인한 폭력 장면이 많고, 결말이 암울하며, 감정 이입할 인물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점들이 흥행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영향은 제한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곡성>이나 <내부자들> 같은 영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관객들은 이미 다양한 표현과 장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 영화의 흥행 부진이 각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수작들이 쏟아져 나온 90년대말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호황을 맞았으나, 부실한 각본에 돈을 펑펑 쓰며 흥행에 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영화 산업 전체가 휘청거렸던 2000년대 중반의 상황을 다시 경험하지 않으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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