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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후 45 Years (2015)

2016년 5월 9일

45y_P

2016. 5. 5. 개봉

수십 년간 별 탈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오랜 기간을 함께 보내도 괜찮을 만한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부부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헤쳐 나가는 과정 자체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 영화 <45년 후>의 주인공 케이트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결혼 45주년 기념 파티가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요. 자신은 교사로서, 남편 제프는 공장의 관리직으로서 한 고장에 오래 자리를 잡고 살아온 그녀의 인생은 남부럽지 않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배달된 편지가 그녀의 결혼 생활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독일어로 된 그 편지는, 알프스 빙하에 추락사한 남편의 결혼 전 애인이 수십 년만에 발견됐다는 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남편 제프는 점점 이상하게 변해갑니다. 어학에는 손놓고 살던 양반이 갑자기 독일어 사전을 찾질 않나, 묻지도 않은 과거 애인과의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고, 건강 때문에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며, 밤중에 혼자 깨어나서 옛 추억에 잠기기까지 하죠.

영화는 남편의 변화에 따른 케이트의 심리를 차근차근 끈질기게 추적합니다. 케이트 역할을 맡은 샬롯 램플링은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 아래에 감춰진 요동치는 내면의 감정을 조용하지만 힘있게 표현합니다. 젊은이 못지 않게 잘 관리된 그녀의 몸매가 부각되는 샷들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평온한 태도와 긴장 관계를 이루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듭니다.

샬롯 램플링은 올드 팬들에게는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나 <엔젤하트>, <죽음의 카운트다운> 등에서의 인상적인 역할로 기억에 남는 배우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파격적인 연기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과감함은 장년에 접어든 2000년대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사랑의 추억>(2000)이나 <스위밍 풀>(2003) 같은 영화는 그녀가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요. 덕분에 노년에 접어든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흔치 않은 여배우가 되었습니다.

옛 애인 생각에 빠져 관객을 속터지게 만드는 남편 제프 역할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해낸 톰 커트니는, 기사 작위까지 받은 영국의 대배우입니다. 일찍이 60년대에 <장거리 주자의 고독>(1962)의 주인공 콜린, <닥터 지바고>(1965)에서 라라의 연인 파샤 역할 등으로 영화계의 각광을 받았지만, 이후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두 사람은 이 영화로 2015년 배를린 영화제에서 나란히 남녀 주연상을 받기도 했지요.

원작 단편 소설을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감독 앤드류 하이는 편집 보조로 영화 일을 시작했던 경력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다르게, 커팅을 최소화하는 대신 샷의 크기 변화를 통해 리듬감을 창출하려 노력합니다. 인물을 어느 정도 크기로 보여줄 것인지를, 앞뒤 컷과의 연결까지 고려하여 세심하게 신경쓴 것이 돋보이지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인공의 내면 묘사를 배우의 연기에만 맡겨 둔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상태로도 관객이 충분히 주인공의 감정을 유추하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만, 모호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러닝타임에 비해 영화가 길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죠.

소설에서는 인물의 내면 묘사가 감정 상태를 짚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영화에선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색 과정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요소들을 추가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 영화도 주변의 소소한 사건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이나 행동을 통해 감정 상태를 명확하게 짚어 주는 지점이 몇 군데 있었더라면 훨씬 흥미진진했을 것입니다.

결혼이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개체의 합리적인 재생산을 위해 만든 제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이나 감정과 충돌하는 지점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이 영화의 노부부처럼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이라는 결혼 제도의 핵심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무형의 압박이 가해지고 관계가 뒤틀리기 일쑤입니다.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45년의 세월 동안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을 숨기고 살게 만들 정도로 억압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기간 동안에 완벽하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죠. 이 영화 <45년 후>는 이렇게 아주 은근하지만 치명적인 방식으로 결혼 제도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나 완성 쯤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극 중 케이트가 느끼는 불안감과 배신감도 결국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요. 하지만 훌륭한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태도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상대를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놓고 굳이 그것을 남에게 보이려  30주년, 40주년 파티를 열지만 않는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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