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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2012)

2013년 3월 29일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역시 영화를 잘 찍는다는 겁니다. 어릴 때는 스필버그 영화의 내러티브가 진부한 선택을 한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저 자신도 아이템을 굴리고 시나리오를 계속 쓰다보니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도록 정확하게 설정을 깔아 놓는 것들이 이제는 보입니다. 그 내러티브의 구조 안에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자 귀결이 되도록 말이죠.

가장 좋았던 걸 꼽으라면 역시 근래 보기 드문 수준의 로우키 촬영입니다. 어둠의 심도와, 정확하게 통제된 빛과 그림자가 보여주는 쾌감은 가히 할리우드만이 선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장에서라면 회차 무지 잡아 먹는, 그야말로 이 죽일 놈의 디테일일 텐데 말이예요. 거기선 이런 걸 정해진 회차 내에 소화해 냅니다. 물론 한 회차에 투입되는 제작비 규모가 엄청난 수준일 테지요.

이 영화는 대의정치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왕조 시대라면 복잡할 게 없죠. 그저 똑똑하고 도덕적인 이상주의자가 절대 군주라면 모든 게 쉽고 정의로울 테니까요.(물론 이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때도 왕이 자기 맘대로 통치할 수는 없었죠.) 그러나 대의제를 기반으로 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는 복잡하게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이 투표로 뽑힌 국민의 대표에게, 사법부에게, 또 자신에게 반대하는 관료에게 각각 나뉘어져 있으니까요. 이런 상태에서는 정치가가 비상하게 고매한 이상과 신념을 가지면 가질수록 일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선 설득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때론 위협까지 할 수 밖에요.

뭐 비단 정치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여러 사람이 주체가 되어 참여하는 일들은 모두 그렇지요. 여러분의 직장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일하는 영화계도 똑같습니다. 영화감독이 자기 맘 속에 들어 있는 걸 스크린에 펼쳐내기 위해서는 연기자와 스탭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면서 어떻게든 목표 지점까지 가야하니까요. 물론 여기서도 자기 생각이 특이하면 특이할수록, 고집이 세면 셀수록 일은 더 꼬여가기 마련입니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고요.

언제나 문제는 이런 당연한 과정과 노력이 무시될 때 생깁니다. 자기가 모시는 사람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왕조 시대에도 불가능했던 짓을 할 때. 자신의 적수를 향해 선한 의도를 가졌다면서 어찌 그런 물밑작업과 정치공학을 시도할 수 있느냐고 억지를 부릴 때. 자기 신념과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무작정 더 나은 걸 해보자고 목소리만 높일 때. 나는 똥거름을 뒤집어쓸 수 없으니 내 순결한 의도를 그저 믿어 달라고만 할 때.

오늘날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누구든 돈과 권력과 명성만 있으면, 합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는 수고 없이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니까요. 그동안 생략해 온 절차와 과정을 돌아 보면서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지 않으면 우리 같은 일반 시민들은 그냥 죽어나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새 정치를 하시겠다는 분이 이 영화를 추천하면서 ‘여야를 설득하고 전략적으로 사고해서 결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이야기한 건 넌센스라고 할 밖에요.

P.S. 스포일러이긴 한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마지막에 링컨의 총격 사실이 밝혀진 후 막내 아들의 반응으로 붙이는 컷이었습니다. 링컨이라는 공인의 죽음에 관한 슬픔을 사랑하는 가족, 그 중에서도 형제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링컨이 늘 챙기고 다녔던 막내 아들이 겪었을 슬픔으로 축약해서 보여 준 것이죠. 그러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크기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버립니다. 물론 이 컷은 절대 느닷없이 나온 게 아니예요. 영화 내내 준비된 것이죠. 바로 이런 게 연출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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