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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Moth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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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2017. 10. 19. 개봉

여성 입장에서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삶의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뱃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때가 되어 출산하는 경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양육 부담이 여성에게 많이 쏠릴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 활동이나 자아실현을 막는 족쇄가 되기도 하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제니퍼 로렌스)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편(하비에르 바르뎀)과 단둘이 외딴 저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때 완전히 불에 탄 적이 있는 남편의 저택을 새로 꾸미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한때 재능이 넘치는 시인이었던 남편은 뭔가를 써 보려고 하지만 한 줄도 못 쓰는 상태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를 의사라고 밝힌 불청객(에드 해리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남편은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여 마치 오래 전에 알았던 친구처럼 대하면서, 자고 가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 자체를 불편하게 느끼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음 날에는 불청객의 아내(미셸 파이퍼)까지 등장하여 사사건건 주인공의 속을 뒤집어 놓지요.

고딕 호러의 활용

<마더!>는 공포 소설의 한 갈래인 고딕 호러의 이야기 구성을 따릅니다. 고딕 호러는 비밀이 담긴 성이나 저택을 배경으로 등장인물 간의 애정 관계가 얽히면서 벌어지는 무서운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무대가 되는 공간은 중심 인물의 정념이 투사된 경우가 많고, 주로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면서 인물의 주관적 현실 인식과 객관적 세계 사이의 간극이 주는 아이러니를 활용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사는 저택은 남편의 창조력 회복과 이상적인 가정에 대한 그녀의 열망을 담고 있으며, 종종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줄기차게 제니퍼 로렌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화면 역시, 1인칭 시점이 주는 아이러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관객의 관심을 주인공의 감정에 몰아주기 위한 것입니다.

전반부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불청객 가족은 주인공이 여러 가지 이유로 직접 드러내지 못했던 진짜 욕망을 재조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이 안주인 제니퍼 로렌스가 세워 놓은 질서를 어지럽히고 집을 훼손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안에 봉인된 그녀의 열망을 해방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해방된 욕망은 곧바로 결실을 보게 되지만, 그 결실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주인공에게 악몽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성서 속 일화에서 차용한 모티브가 상당수 사용됩니다. 가진 것을 나누라는 예수의 가르침,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 피와 살을 나누는 디오니소스 제의와 맥락이 같은 성찬 의식 등이 그것입니다.

제니퍼 로렌스는 섬세한 표정 연기를 통해 개인의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처받기 쉬운 주인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그동안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남은 상처도 못지않게 큰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장기였는데, 여기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마음을 드러내고 분노를 표시하는 스타일의 연기를 보여 줍니다.

종교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신화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전작 <노아>에서도 그랬듯, 유대교-기독교 전통을 바탕으로 자기식으로 재해석한 신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발상이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일반 관객에게 딱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논평이라고 볼 만한 연계 지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 주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신화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대-기독교 전통의 부정적인 면모는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개인의 욕망과 개성을 부정하는 이 종교 전통의 전체주의적 특성입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꾸고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은 주인공의 개인적인 욕망은 영화 전반에 걸쳐 철저히 부정당합니다. 성서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자주 거론되는 욥이나 요나가 고난을 겪은 이유도 이처럼 신의 의지보다 개인의 판단을 앞세웠기 때문이었죠.

또한, 특유의 가부장적인 성격 역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영화 내내 여성으로 설정된 주인공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정도로 온갖 수난을 겪습니다. 이 ‘아버지 하나님’ 전통에서는 여성이자 ‘어머니 세계’로 설정된 캐릭터를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고 고통받게 하는 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의 기독교 정신은 예수가 공생애에서 보여 준 모습을 예로 들며, 모든 차별과 고통에 반대하는 박애주의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신의 뜻 – 즉, 종교 공동체의 뜻 – 에 따라 사는 삶을 중요시하고 기존 사회 체제를 내면화한 가부장제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독의 진짜 의도와는 상관없어 보이지만, <마더!>는 이 오래된 종교적 전통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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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2017] 인 더 페이드 Aus dem Nicht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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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카티야(다이앤 크루거)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터키계 남편 누리, 귀여운 아들 로코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카티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생한 불의의 폭탄 테러 때문에 누리와 로코가 즉사하고 맙니다. 절망에 빠진 카티야는 이것이 인종 차별에 기반을 둔 혐오 범죄임을 직감합니다.

이 영화는 2011년에 밝혀져 독일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진 극우 조직원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들은 2000~2007년 사이에 케밥을 팔던 외국인(터키계 8명, 그리스계 1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독일 및 유럽 전역에서 외국인 혐오 정서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은 이 영화에 동시대성을 충분히 부여합니다.

사건 전후, 사법 절차, 판결 이후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된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으로 만들었다면 사법 정의가 실현되는 정의의 서사가 되었거나 흔한 개인적 복수극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카티야의 내면 풍경을 찬찬히 따라잡으며 독일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사법 체계의 한계를 낱낱이 보여 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바라는 전형적인 독일 여성의 삶을 살아왔다고는 볼 수 없는 카티야와 쿠르드계로서 한때 마약 거래에 손댄 적도 있는 누리의 이력은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감독 파티 아킨은 터키계 독일인들의 삶을 다룬 <미치고 싶을 때>(2004)로 베를린 황금곰상, <천국의 가장자리>(2007)로 칸 각본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던 감독입니다. 극단적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특유의 스타일은 이 영화에서도 돋보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라 카티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격랑을 훨씬 더 많이 활용합니다. 카티야 역을 맡은 다이앤 크루거는 섬세한 내면 연기로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순간을 여럿 선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처받기 쉬운 마음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순간들을 보여 주는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열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국가

국가나 지역 공동체는 공동체의 분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뻔히 존재하는 현실의 차별과 혐오를 공식화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을 두고 수사 당국이나 언론에서는 법조계나 범죄학자들의 ‘(용어의 정의상) 여성 혐오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발언을 지속해서 인용하며 갈등을 봉합하려 했던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영화 속에서 카티야가 겪는 가장 큰 불행은 그녀가 명백한 인종 차별 범죄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것을 공식화하고 쟁점으로 만드는 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데 있었습니다. 갈등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 대신 이렇게 봉합하고만 결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유럽 각국에서 외국인 혐오와 차별 정서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 더 페이드>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여자연기상을 받은 작품으로,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독일 대표로 출품되기도 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월드 시네마 부문에 초청되었으며, 18일 오후 4시와 20일 오후 4시 상영이 남아 있습니다.

[BIFF 2017] 뽀빠이 Pop Ay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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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막막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했더라도, 가정이나 일터에서 자신이 예전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힘이 쭉 빠진다는 거죠. 그래서 이 나잇대에 접어들면 골프나 등산, 낚시 같은 새로운 취미를 즐기거나, 반려동물을 키우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 영화 <뽀빠이>의 주인공 타나가 바로 딱 그런 상황입니다. 그는 태국의 중견 건축가로서 20여 년 전 방콕 중심가의 랜드마크인 가든 스퀘어를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신세대인 새 사장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고,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아내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아 심각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방콕 시내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늙은 코끼리 한 마리를 본 것입니다. 그는 이 코끼리가 어릴 적 시골집에서 길렀던 ‘뽀빠이’임을 확신합니다. 당시 즐겨 보던 만화 영화 시리즈 <뽀빠이>의 주제가를 흥얼거리자 곧바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죠. 타나는 주인에게 돈을 주고 코끼리를 사서 집으로 데려오고, 우여곡절 끝에 뽀빠이와 함께 고향 마을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 ‘코끼리’ 로드 무비

사실 내용만 놓고 보면 독특한 이야기나 설정은 없습니다. 여느 로드 무비처럼 타나와 뽀빠이는 노숙자, 트랜스젠더, 경찰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길 위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있으며, 웃음과 낭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코끼리라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코끼리와 인간이 단짝이 되어 떠나는 도보 여행은 낯설고 이국적이면서도 따뜻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타나가 뽀빠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이지만, 실질적으로 영화 내내 타나를 돌보고 그를 치유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뽀빠이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이 영화의 각본은 여러모로 뛰어납니다. 특히 설정 부분에서 시간대를 뒤섞어 관객이 인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유지하게 한 것, 중심 플롯의 주제를 변주한 서브플롯들이 인물의 내적 변화 과정과 정교하게 맞물리도록 구성한 것 등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감독의 연출력도 좋습니다. 작가로서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관찰력과 그것을 논리적으로 배열할 줄 아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특별한 기교 없이 샷의 크기 변화와 편집 타이밍만으로 블랙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를 오가는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젊은 여성 감독의 범상치 않은 데뷔작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의 젊은 여성 감독 커스텐 탄(Kirsten Tan)은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입니다. 단편 시절부터 주목받았고, 2006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주최한 ‘아시아 젊은 영화인을 위한 포럼(AYFF)’에 초청받아 한국에서 체류한 적도 있습니다. 또한 태국에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며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현재는 영화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던 미국 뉴욕에서 8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랑자이자 국외자로서 살아온 삶의 경험이 이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 속 타나 같은 중장년층 남자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는 결국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고, 사람들은 실제보다 자신을 과대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부풀려진 자아상을 바로 잡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 그것이 바로, 희한하게 웃기면서도 가슴 한 구석을 묘하게 시리게 만드는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뽀빠이>는 올해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각본상을 받은 작품으로, 얼마 전에는 내년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에 싱가포르 대표로 추천받기도 했습니다.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이며 17일 오후 4시, 19일 저녁 8시, 20일 오전 11시 등 모두 세 번의 상영이 남아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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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픽쳐스

2017. 10. 12. 개봉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82년에 나온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는 SF 영화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수작입니다. 인간과 흡사하지만, 수명이 제한된 안드로이드 ‘리플리컨트’와 그를 잡기 위한 특수 경찰 ‘블레이드 러너’의 대결을 흥미롭게 다루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무엇이 진짜 삶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35년 만에 돌아온 후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원작의 시간대에서 30년이 흐른 다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형 리플리컨트로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구형 모델을 추적하여 잡아들이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표 대상을 검거하고 주변을 수색하던 중 약 30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리플리컨트에게 출산한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조인간임에도 생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으로 생각한 K의 상관(로빈 라이트)은 유골의 정체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전편의 아우라 계승한 잘 만든 속편

속편을 잘 만들기가 어려운 것은 전작과 연계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상상하고 장면을 구상해도 잘 될까 말까인데, 매번 전작의 설정이란 전제가 따라붙는 상황이라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전작과의 연결 고리를 영화 속에서 밝혀내야 할 미스터리의 중심에 놓으면서 그런 어려움을 정면 돌파해냈습니다. K가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전작의 상황에서 이어지는 뒷이야기를 짜 맞추는 과정과 그대로 겹칩니다.

전작의 30년 후 LA의 풍경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프로덕션 디자인, 광대한 자연환경과 문명의 잔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K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촬영, 염세적 분위기를 더하는 음악을 포함한 사운드 믹싱 등도 전작의 분위기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감독 드니 빌뇌브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딱히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을린 사랑>부터 올 초에 개봉한 <콘택트>까지 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미스터리 플롯이 강조됩니다. 느린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심 사건을 해결하는 것 외에 다양한 층위의 쟁점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죠.

이번 영화는 전작들에 비하면 인물이 겪는 갈등이 비교적 단순한 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할 시간을 준다기보다는 불필요하게 질질 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의 호흡이 빨랐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흥행 성적도 지금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인간은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더 살아서 무엇하나’는 생각이 들면서 사는 것 자체가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자기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치명적인 경우로 발전하게 됩니다.

꼭 사회 경제적 성공이나 명성 같은 것이 있어야 인생에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관심과 우정을 나누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 자식을 키우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 등은 모두 이런 욕구와 연결돼 있습니다.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텃밭을 가꾸는 일 역시 같은 효과를 내곤 하니까요.

이 영화에서 리플리컨트 K가 원했던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는 인간들이 부여한 임무를 그대로 이행하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기를, 또는 자기에게 남다른 무언가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그런 생각은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된 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의미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시험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간다움의 열쇠는 자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편 <블레이드 러너>에서 누구보다 인간다웠던 리플리컨트의 염원이 제한된 수명을 인간만큼 늘리는 것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그와 반대로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갈증을 다룹니다. 어떤 것이 진짜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전편의 문제 의식은 35년이 지나서 나온 속편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범죄도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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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박스(주)플러스엠

2017. 10. 3. 개봉

최근의 한국 장르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범죄나 사회악과 맞서 싸우는 액션물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는 완성도 높은 각본과 볼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화려한 액션 장면이 이 장르의 상승세를 이끌었습니다.

<범죄도시>는 그런 상승세를 잇는 영화입니다. 금천경찰서 강력반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가리봉동 조선족 밀집 지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역 폭력 조직 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큰 문제 없이 유지되던 지역의 질서는 홀연히 나타난 장첸(윤계상) 일행 때문에 완전히 흐트러집니다. 이들은 상식을 넘어서는 잔인함을 무기로 지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이제 마석도와 동료 형사들은 장첸을 잡아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크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조선족 밀집 지역을 배경으로 90년대와 2000년대에 나왔던 조폭 액션물과 유머가 가미된 형사물을 잘 조합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도 없고, 억지스러운 로맨스가 펼쳐지지도 않습니다. 각자의 이권이나 직업의식 같은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대결이 펼쳐지기 때문에 어색하거나 작위적인 부분이 없는 편입니다.

선입견 없이 영화 설정에 맞는 배우들을 다채롭게 활용한 캐스팅은 이 영화의 큰 미덕 중 하나입니다. 윤계상에게 평소 이미지와 다른 지독한 성격의 악역을 맡긴 파격은 물론이고, 조 단역 캐스팅에서도 해당 역할에 너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이 돋보입니다. 주로 악역을 많이 했던 최귀화가 허당 강력팀장을 연기한 것이나, 연기력에 비해 덜 주목받았던 진선규가 장첸의 오른팔 위성락 역할로 존재감을 과시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마동석이 있습니다. 그가 연기한 마석도는 지난해 출연작인 <부산행>과 <굿바이 싱글> 같은 영화에서 보여 준 것처럼, 강력한 힘이나 뚝심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자상함을 갖춘 인물입니다. ‘마블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그의 존재감은 이번 영화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주 치밀하지는 않은 수사 과정의 약점을 덮어 주고, 수위 높은 폭력 장면이 만들어 낸 긴장감을 적절히 완화하면서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재미를 높여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마석도는 한국 영화에서 가장 성공한 형사물 중 하나인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보다 정감 있는 캐릭터라서, 앞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속편을 만든다 하더라도 기본 이상의 재미는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편의 영화가 기획되는 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워낙 큰 자본이 투입되는 작업이다 보니 위험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개성적인 시도를 하기보다는, 이미 흥행한 아이템이나 장르를 반복하려 하거나, 흥행 실적이 있는 배우나 스태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다고 해서 흥행에 성공하거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괜찮은 작품은 어느 정도 위험성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창의적으로 극복하려 노력할 때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조금만 편안해도 게을러지기 쉬운 존재이다 보니, 제작 여건이 좋으면 좋을수록 긴장이 풀리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좋은 작품을 내놓는 배우나 감독들의 노력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일 겁니다.

올해 본 한국 영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장르적 완성도도 높았던 영화를 고르라면 <조작된 도시>와 <불한당>을 꼽고 싶습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장편 영화 경력이 많지 않은 감독과 관객 동원력에 물음표가 붙은 배우들이 함께했으며, 기존 한국 영화계의 관행적인 선입견을 뒤집는 신선한 시도를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영화적 재미나 완성도만큼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범죄도시>는 이 영화들과 비슷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놓았고, 관객들의 우호적인 반응까지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폭력배와 경찰의 대결이라는, 한국 영화에서 닳고 닳은 설정으로도 이런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제대로 된 장르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뭉친 배우와 스태프들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한국 영화들이 더욱 늘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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